Tiny Hand DEEZ

 '가족'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꾸밈이 없는 담백한 스토리로 잔잔하고도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신인 작가라니. 이야기 속으로 이끌려 가며 글 속에 공감 포인트가 이다지도 많다는 것에 감탄했다. 그리고 '가족'과 관련된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그리고 누구나 생각하는 것. 있을 때 잘하자! 이 책을 읽으며 또 다짐했다. 최은영 작가님 단편 말고 장편소설도 써주세요 무조건 읽겠습니다...


[문장 옮기기]

 

<쇼코의 미소>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중심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서도 밀려나서, 역시나 대양에서 밀려난 바다의 가장자리를 만나는 기분이라고. 외톨이들끼리 만나서 발가락이나 적시는 그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했다.


 쇼코는 더이상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쇼코의 가상 친구나 일기장 정도였는데, 쇼코는 그냥 그 일기장에 일기 쓰기를 그만둔 것뿐인데, 일기장 주제에 쇼코의 삶에 개입하려고 했다니.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불에 타다 만 발바닥."

 "등이 꺼져버린 하이웨이 위의 가로등."

 "썩었으되, 그것뿐인 씨앗."

 "발을 맞춰 걷지 못하는 군인."

 "의욕 없는 독재자."

 "전형의 반대말."

 "그러나...... 전형."

 "이럴 줄 알았다는 말의 이상한 메아리."

 "얼어죽기 직전까지 바닥을 찍는 비둘기."

 

 쇼코는 그림들과 그 제목들을 다 소개한 후에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쇼코."


 저렇게 제멋대로고 충동적이고 마음 여린 이상한 사람. 이상한 나의 할아버지. 저 엉망진창인 사람.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할아버지가 씌워준 우산을 쓰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가끔씩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면 받지 않거나 건성으로 받곤 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냥 당연히, 원래 그렇게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씬짜오, 씬짜오>

 

 독일에서의 일은 이제 뿌연 유리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처럼 희미하다. 그런데도 처음 투이네 집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리면 그때 느꼈던 감정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투이네 식구 모두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던 일, 그 환대에 기뻐하는 엄마의 모습, 어떤 조건도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따뜻한 기분과 우리 두 식구가 같은 공간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던 공기를 기억한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호의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고작 한 명의 타인과도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는 어른이 된 나로서는 그때의 일들이 기이하게까지 느껴진다.


 본격적인 여름에 들어서자 밤 열시가 넘어도 대기에는 초저녁처럼 희미한 빛이 남아 있었다. 빛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눈앞의 풍경이 푸른빛에 잠길 때의 모습을 나는 좋아했다. 거실 창문으로 밤바람이 불어오고, 부엌에서는 어름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그 시간이 되면 꼭 입을 벌리고 잠들었던 투이의 얼굴을 볼 때, 푸른빛의 채도가 점점 낮아지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씩 켜질 때면, 나는 내가 언젠가 이 시간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항상 가지고 있는 생각인데 이 책에 그대로 적혀있어서 어찌나 놀랐던지.)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몇 번이나 독일로 출장을 가면서도 나는 플라우엔에 들르지 않았었다. 기차로 두 시간 거리의 라이프치히에서 열흘 동안 체류했을 때도 나는 애써 그곳을 외면했다. 그곳에는 서로를 경멸하는 부모 밑에서 영혼의 밑바닥부터 떨던 아이가 있었고, 단 한 번의 포옹도 없었던 차가운 이별과 혼자 울던 길거리가 있었다.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다시 웃으며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끝이 어떠했든 추억만으로도 웃음지을 수 있는 사이가 있는 한편, 어떤 헤어짐은 긴 시간이 지나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는다고.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한지와 영주>

 

 "죽음 뒤의 삶이 영원하다면,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지금의 삶은 왜 존재하는 거지? 천국은 이런 삶에 대한 보상이라는 거야?"

 "이런 삶?" 카로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카로에게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죽고 나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기를 바라왔다고. 아니, 차라리 처음부터 나라는 것이 없었으면 했다고. 그게 삶을 다 겪어내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그러면서도 한지는 아버지의 돈으로 좋은 교육을 받았고, 가족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이 누려왔던 삶은 부모님의 부로 인한 것이었고, 그 부가 누군가를 착취한 결과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눈을 감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는 건 결국 돈뿐이라고 고백했다.

 


 서로가 없었던 예전의 시간은 온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그 텅 빈 어둠 속에서 '한때 지구는 이렇게 쓸쓸한 곳이었구나'라고 생각한다.

 지구는 그저 융기하고 침식하며, 열심히 퇴적하고 있었구나.

 참 열심히, 쓸쓸히도.


<미카엘라>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비밀>

 

 넌 궁금한 게 많은 아이였잖여. 할머니! 부르곤 재미난 소리들을 잘혔어. 개미들두 나처럼 이불 덮고 자? 하늘의 스위치는 누가 켜고 꺼서 아침이랑 밤이 와? 할민 그런 소릴 하는 너가 어디서 왔는지 신기혔었어. 너라는 애를 모르구 사십 년 넘게 살았었는데 그때 넌 어디 있었냐. 어디서 와서 이런 신기한 얘길 하는 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