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y Hand DEEZ

 

 이 책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단순했다. 이동진 작가님이 쓰신 '밤은 책이다'라는 독서 에세이 중 '새의 선물' 서평 챕터에서 <아비정전> 장국영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것이다. 홍콩 영화광이었던 고등학생의 나는 이차적인 사고를 거칠 필요도 없이 당장 중고서점으로 달려가서 이 책을 구매했다. 나의 장국영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책을 사놓고서 난 내 책장에 새의 선물이 꽂혀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살았다. 이 책은 그렇게 5년을 꼼짝 않고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5년이 지난 지금에야 내 눈에 띄게 된 것이다. 몇 페이지를 채 읽지 않았을 때 깨달았다. 보석 같은 책이구나. 제 가치를 알아주길 얌전히 기다리며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던 보물이로구나. 오랜만에 내 마음에 쏙 들어온 소설책 한 권이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1960년대 대한민국. 6·25전쟁의 결과로 마을에서 전사자의 유족들이나 상이군인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으며, 온 국민에게 주민등록번호가 처음 발급되던 시절이었다. 열두 살 소녀인 진희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할머니, 이모, 삼촌과 함께 살아왔다. 진희의 가족이 사는 집은 우물을 중심으로 두 채의 살림집과 한 채의 가게채가 있고, 다른 식구들이 세 들어 같이 살고 있다. 스스로 이미 성장을 끝냈다고 생각하는 진희의 성숙한 시점으로 이 인물들이 관찰되며 잔잔하게 서사가 진행된다.

 

 진희는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하며 특정 순간마다 극기훈련을 통해 자신의 나약한 부분을 이겨내고 이지적 면모를 발전시켜왔다. 그런 진희에게 세상은 시시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진희는 또래보다 냉소적이고 차분한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아이답지 않으면 오히려 아이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진희는 남들에겐 적당히 똑똑한 열두 살인 것처럼 보이도록 행동했으며, 성인이 되고도 철딱서니 없던 이모는 이런 진희에게 많이 의지했다. 할머니는 진희가 부모님의 부재를 느끼며 언젠가 실의에 빠지게 될까 봐 늘 진희를 걱정하고 진희의 기색을 살폈다. 진희는 입 밖으로 내뱉지 않더라도 이러한 가족들의 생각을 거의 다 읽고 있었다.

 

 남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장군이 엄마, 남편에게 맞고 살면서 그게 자신에게 주어진 생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삶은 꿈꾸지도 못하는 광진테라 아줌마, 이 시대의 풍운아라고 떠들어대고 다니지만, 실제론 하는 일도 없이 술 처먹고 정치 얘기나 하는 것을 좋아하는 광진테라 아저씨, 이 밖에 최 선생님, 이 선생님…. 1인칭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진희의 눈을 통해 관찰되는 같은 집 식구들은 굉장히 입체적으로 묘사되면서 심리까지 대강 보인다. 인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구체적으로 캐릭터화하는 것이 이 책의 재미 중 하나였다.

 

 특히 서울에서 내려와 진희의 집에 잠시 신세를 지게 된 허석이라는 인물에게 진희가 갖는 감정이 유독 흥미로웠다. 진희는 노을 지는 언덕을 배경으로 염소 옆에서 하모니카를 부는 실루엣에 반해 허석을 사랑하게 되는데, 허석이 서울로 돌아갔다가 다시 내려오기까지 진희가 느끼는 감정들을 읽는 것이 재미났다. 그리고 하모니카를 부는 남자는 결국 허석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어 환상에서 깨어나 버린 진희의 울음이 절절하고 안타까웠다.

 

 아무리 성숙했어도 열두 살 아이치고는 진희가 너무 영리해 보인다는 점이 약간의 흠이었지만, 그래도 똘똘한 아이의 장점을 잘 살려 관찰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에 이처럼 흥미로운 주변 인물 설정과 에피소드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끝까지 읽고 보니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계기였던 장국영은 결국 진희의 특정 면모를 비유하기 위해 끌어온 인물일 뿐이었지만, 내게 이 선물 같은 책을 사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책 제목이 '새의 선물'인 이유에 대해서는 이 링크를 참고 바란다. 링크


[문장 옮기기]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이렇게 내 내면 속에 있는 또다른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지켜보게 하는 것은 20년도 훨씬 더 된 습관이다.


 내가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것을 의식할 만큼 성장하자 나는 당황했다. 내가 딛고 선 출발선은 아주 불리한 위치였다. 더구나 그 호의적이지 않은 삶은 내가 빨리 존재의 불리함을 깨닫고 거기에 대비해주기를 흥미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은 내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상처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아마 그때부터 내 삶을 거리 밖에 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 이면을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삶의 비밀에 빨리 다가가게 되었다.


 진짜의 나 아닌 다른 나를 만들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이 위선이나 가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꾸며 보이고 거짓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키는 일은 나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작위'라는 말을 알게 된 뒤부터 그런 의혹은 사라졌다. 나의 분리법은 위선이 아니라 작위였으며 작위는 위선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부도덕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봉희처럼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하는 어린애들을 경원한다. 어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것처럼 스스로 어린애임을 드러내 보이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린애답게 보이는 것이다. 어린애로 보이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비상시에는 강력한 무기도 된다. 그런데도 아무런 이지적 노력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시간이 해결해주는 그따위 신체적 성장을 남의 눈앞에 앞당겨서 보이려 한다거나 다만 금기라는 사실 때문에 본뜰 가치도 없는 어른 흉내에 매료된다거나 하는 것은 역시 봉희 같은 어린애들만의 생각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런 떠남을 생각하며 아줌마는 사라진 버스 쪽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가 돌아보는 순간 그 모습은 내 눈 속에 그대로 멈춰버린다. 그리고는 찰칵 하는 소리에 이어 현상액에 담가지며 거기에서 물기를 머금고 빠져나와 커다랗게 확대된 뒤 네모난 테두리를 두른 채 내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가슴에 스며든 그 사진액자를 언제까지나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약속을 하기 위해 나는 두 손을 앞가슴에 모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모에게 잡혀 있던 한 손을 힘겹게 빼내야만 했다.


 "며칠 동안 즐거웠는데, 벌써 헤어지게 됐구나."

 처음에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소가 풀을 통째로 삼키듯이 그의 목소리만을 통째로 삼켜버린다. 조금 후에야 소의 밥통에서 도로 끄집어내져 씹히는 풀처럼 그의 말을 도로 새김질해보자 그제서야 그의 말뜻이 머리에 들어온다. 헤어지게 됐구나, 라고.

 "언제 가는데요?"

 "응. 내일."

 허석의 짧은 대답은 내 가슴을 짧게 찌른다. 그러면, 허석이 떠난다는 말인가?

 나에게 있어 이별의 고통을 느끼는 것과 그 이별에 대한 항체가 분비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 음식물이 들어가자마자 침이 분비되는 것과 같다. 이별이 닥쳐왔다는 것을 깨닫자 그것을 녹여 없애기 위해 내 마음속에서는 또 내가 두 개로 나뉘어진다.


"불행한 날에 행복한 지난날을 떠올리는 것은 이중의 고통이다."


 그런데 대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허석이 마루에 앉아 있다.

 처음에는 놀랐고 그 다음에는 내가 드디어 헛것을 보는가 싶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내가 느낀 감정은 놀랍게도 실망이었다.

 그가 다시 온 것이 반갑지 않을 뿐 아니라 실망스럽기까지 하다는 걸 깨닫고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럴 리가 없다. 불과 몇 초 전, 저 대문을 열고 들어서기 직전까지도 나는 그를 얼마나 그리워했는가. 나는 나 자신을 주의깊게 들여다본다. 아무리 보아도 나는 허석과의 예상치 않은 재회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까의 슬픔, 바로 거기에서 이별의 이미지가 완결되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팥쥐역을 맡아 지금껏 열심히 연습했는데 갑자기 콩쥐로 배역이 바뀐 것처럼 나는 맥이 빠진다. 그렇게나 몰두해 있던 팥쥐의 감정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면서 콩쥐의 감정에마저 무덤덤해진다. 이별의 슬픔이 무의미해지자 사랑마저 시들해진다는 걸 나는 처음 깨닫는다.


 아무리 남의 말 하기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광진테라 아줌마처럼 나무랄 데 없이 착한 사람에 대해서는 선뜻 비방의 포문을 열 수가 없다. 나쁜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면 이야깃거리일 뿐이지만 착한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면 그것은 비극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이모는 밥상머리에서 이런 소리로 할머니를 떠보았다.

 "취직이 안 되면 어디 가서 식모살이라도 해야지, 돈 없어 미치겠어."

 "식모살이라고? 하지 그러냐. 제 양말 한짝 안 빠는 것이 식모살이 하면 어련히 잘 하겠다."

 "닥치면 하지 왜 못해? 방앗간집 영숙이도 했는데, 걔는 나보다 훨씬 부잣집 딸이었잖아?"

 "그거야 방앗간이 망했으니 저라도 벌어야지 할 수 있냐."

 "글쎄 나도 그렇다니까. 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식모살이라도 하려고 하는 거라구. 하면 하지 못할 게 뭐 있어."

 이모는 논리라는 것을 모른다. 지금 자기가 주장해야 할 것은 식모살이라도 해야 할 만큼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으니 지원을 해달라는 내용이지 식모살이를 기어코 하겠다는 내용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자기 말이 뻗어가는 대로 엉뚱한 곁가지를 잡고는 자기가 식모살이를 못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하느라 침을 튀기고 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자기에게 식모살이를 할 충분한 이유와 능력이 있다는 주장을 관철시킨 후에는 자기가 그 주장을 위해서 왜 그렇게 핏대를 올렸는지 말머리를 잃어버리며 자기의 앞에 놓인 결론, 즉 자기가 식모살이 하기에 이유와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으니 당장이라도 식모살이를 해도 된다는 판정만이 남아 있다는 데에 스스로 어리둥절해진다. 매번 그런 식이다.


 이모는 이형렬이 자기의 영원하고도 유일한 사랑이라는 지극히 서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세상을 서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상처받게 마련이다.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서정성 자체가 고통에 대한 면역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이모처럼 감상적인 사람은 삶을 너무 낙천적으로 생각한다. 아니 삶이 자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다. 자기의 행복과 불행의 조종간을 통째로 타인의 손에 쥐어준다면 그 타인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잠시일 뿐이다.

 사람의 감정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며 특히 젊은이를 변심하게 만드는 일은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상대가 나를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상대의 사랑을 잃을 때 내가 불행해진다는 것과 같은 뜻임을 깨닫고 그 사랑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한편 그것이 사라질 때의 상실감에 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타인을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이 세상에 그런 사랑은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이모는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정치활동이 일찍 끝났는지 대문을 들어서는 아저씨는 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다.

 "길을 가다가 사장님 하고 살짝 불렀더니 열에 열 사람 모두가 돌아보네요. 사원 한 사람 구하기 어렵다는데 왜 그렇게 사장님은 흔한지 몰라요.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몽땅 사장님……"

 아저씨는 오토바이를 받쳐놓고 노래 끝을 올리면서 후렴귀를 불렀다.

 "사랑 사랑 내 사랑아 몽땅 사장님. 몽땅 사장님."

 그 노래의 2절은, 사장님 하고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가는 사람이 있길래 가서 물어보니 전무였다, 전무님도 이제 곧 사장이 될 테니 사장님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그러니 전무 역시 몽땅 내 사랑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아저씨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자기도 사장님인지라 가사에 공감을 느껴서이기도 하려니와 얼굴이 벌건 것으로 보아 지금까지 어디선가 술을 마시며 이 노래를 부르다가 왔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란 장난기와 악의로 차 있다. 기쁨을 준 다음에는 그것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기쁨을 도로 뺏어갈지도 모르고 또 기쁨을 준 만큼의 슬픔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기쁨을 내색해도 안 된다. 그 기쁨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삶의 악의를 자극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선한 것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지만 악에 대해서는 실수라거나 충동이라거나 하는, 자신의 통제로부터 이탈되었다는 뜻의 이름을 달아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런 사람들은 삶을 위대하고 진지한 것, 아름다운 것으로만 보려는 서정적 인간임에 틀림없다.


 이모는 금방 생각을 바꿨는지 고개를 몇 번 저었다. 확실한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생각중인 생각'까지를 입 밖에 내는 것이 이모의 버릇이었다.

 중국인 화교가 하는 우리 동네 중국집 중앙관에 함께 간 적이 있는데 거기 가서도 이모는 "진희야, 우리 자장면 먹자. 아니 흰 블라우스에 튈지 모르니까 야끼만두가 낫겠다. 그래도 국물이 좀 있어야 하는데, 차라리 우동 먹을까? 야끼만두하고 우동을 다 먹고 싶은데 그랬다간 배가 터지겠고. 하기야 우리 둘이서 우동 두 그릇하고 야끼만두 하나는 먹을 수 있을지 몰라. 참 너는 양이 적으니까 그럼 우동 하나만 시키고 야끼만두를 먹을까? 엄마가 아시면 또 크는 애한테 너무 적게 먹였다고 야단하겠다. 안 되겠다. 우동 두 개하고 야끼만두 시키자. 아저씨, 그렇게 주세요. 우동 두 개에다 야끼만두요.…… 그래도 중앙관에 왔으면 자장면을 먹어야 하는데. 아저씨 잠깐만요. 진희야, 그렇지 않니? 역시 자장면이 좋겠지? 이 블라우스 빨아서 오늘 새로 입고 나왔는데, 에이, 옷 좀 버리면 어때 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자장면 두 개? 참 참 야끼만두는 먹어야지. 그럼 자장면 두 개하고 야끼만두 하나네? 다 먹을 수 있을까. 야끼만두에는 국물이 있어야 하는데 우동이 낫지 않나?" 한다. 이렇게 해서 얘기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삶의 기회에 대해 생각했다.

 구국의 영웅이 되는 것과 살인자가 되는 것의 차이는 그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살인자가 되는 것은 그에게 살인을 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고 배신자가 되는 것 역시 배신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므로. 그 기회를 받아들이느냐 물리치느냐 하는 선택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지만 선택의 전 단계에서 어떤 기회를 제공하느냐는 순전히 삶이 하는 일이다. 배신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배신을 하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언제나 삶의 짓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나는 더이상 성숙할 게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지나간 일기장에서 '내가 믿을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긴 목록을 발견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는단 말인가.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면체로서 언제나 흘러가고 또 변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의 삶 속에 불변의 의미가 있다고 믿을 것이며 또 그 믿음을 당연하고도 어이없게 배반당함으로써 스스로 상처를 입을 것인가. 무엇인가를 믿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그 일기를 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삶을 꽤 심각한 것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나는 그 목록을 다 지워버렸다.

 이제 성숙한 나는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린애의 책무인 '성숙하는 일'을 이미 끝마쳐버렸으므로 할일이 없어진 나는 내게 남아 있는 어린애로서의 삶이 지루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