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y Hand DEEZ

 분명 글을 못 쓰는 건 아닌데 단어 하나하나에 겉멋이 든 느낌... 읽으면서 약간 불편했다. 나도 책상 앞에 진득하게 앉아서 글을 수정하는 작업을 몇 번 거친다면 이 정도 글은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감되는 글도 몇 편 있었지만, '뭐 어쩌라고' 하는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글도 많았다. 자기 직전 한두 편 읽기엔 괜찮았던 수필집이다.


[문장 옮기기]

 

 엉덩이력과 필력은 비례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종일 앉아 있다 보면, 다른 문장으로는 대체될 수 없는 단 하나의 문장이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거의 실패한다. 머릿속에 잠복해 있던 단어가 문장으로 변하는 순간 물 밖으로 나온 생선처럼 신선함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글을 쓰는 작업은 실패할 줄 알면서도 시도하는 과정,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찾아 나서는 행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꽃도 그렇지 않나. 화려하게 만개한 순간보다 적당히 반쯤 피었을 때가 훨씬 더 아름다운 경우가 있다. 절정보다 더 아름다운 건 절정으로 치닫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송나라 때 시인 소옹은 이러한 이치를 멋들어지게 노래했다.

 "좋은 술 마시고 은근히 취한 뒤 예쁜 꽃 보노라, 반쯤 피었을 때."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순간 우린 살아가는 동력을 얻는다. 어쩌면 계절도, 감정도, 인연이란 것도 죄다 그러할 것이다.

 

 영화나 동화 속 사랑은 기적을 만들어내지만, 현실의 사랑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사랑은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

 사랑은 때때로 무기력하다.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사랑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만 사랑은 동전의 양면 같은 성격을 지닌다.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들이밀기도 하지만, 그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리는 것 역시 사랑이라는 이름의 동아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를 망가뜨리지 않는 사랑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사랑의 가치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언젠가 철학자 강신주 박사가 방송에 출연해 말했다. 그는 "한 끼를 해치워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먹는 음식은 식사가 아니라 사료에 가깝습니다."라며 식사와 사료의 개념 차이를 설명했다.

 

 깊이 있는 사람은 묵직한 향기를 남긴다. 가까이 있을 때는 모른다. 향기의 주인이 곁을 떠날 즈음 그 사람만의 향기, 인향이 밀려온다. 사람 향기는 그리움과 같아서 만 리를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 인향만리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