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y Hand DEEZ

 

 몇 달을 질질 끌었지만 어쨌거나 완독! 마음의 짐이었던 과제를 하나 끝낸 기분이다. 고전 읽기에 거부감이 없는 편인데도 조르바는 조금 힘들었다. 일단 내가 신학에 무지해서 수도원이니 하느님이니 붓다니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멍청하게 글자만 읽게 됐고, 그림이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조르바의 언행은 거칠고 난폭해서 그 인물의 대사를 읽을 때면 속이 거북살스러워졌고 공감이 되질 않았다. 여성에 대한 묘사는 또 어찌나 원시적이고 저질스러운지 한국 근대 소설을 읽을 때와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거라고는 하얗고 푸른 산토리니와 지중해뿐인데, 그 상태에서 크레타섬의 갈탄 광산과 투박한 마을을 떠올리기도 힘든 일이었다. 호텔 여주인을 칭할 땐 오르탕스 부인이랬다가 가엾은 세이렌이랬다가 부불리나랬다가 뒤죽박죽이어서 혼란스러웠다. 크레타인들 이름도 러시아인 못지않게 복잡하던데 하나만 하지 하나만...

 

 플롯 자체가 지루한 것도 내가 몇 번이고 이 책을 놓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원고에만 파묻혀 사는 "책벌레"이자 "펜대 운전사"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행동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조르바와 동행을 결심한 주인공. 이 책은 그의 내면 성장에 관한 소설이다. 하지만 야만적인 (주인공은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 조르바와 먹고 대화하는 것 말고는 외적으로 보인 큰 이벤트가 없었고 그런 크레타에서의 일상은 내게 너무 잔잔했다. 그래서 주인공이 겪는 태도의 변화랄지 생각의 발전 같은 것들도 그저 따분하게 느껴졌다.

 

 조르바가 즐겨 먹었던 애저구이와 포도주는 한 번쯤 먹어보고 싶다. 그가 기분이 좋을 때 연주한다는 산투르의 소리도 궁금하고 그들이 바라보았던 크레타의 해변에도 가보고 싶긴 하다. 참 생소한 문화와 배경이어서 신기하고 어려웠다.


[문장 옮기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 리 없다. 아프리카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나는 급히 갈겨썼다. 바빴다. 붓다는 나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는 상징으로 가득 찬 푸른 댕기가 내 뇌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것을 확인했다. 댕기는 빠른 속도로 풀려 나왔다. 나는 따라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나는 썼다. 모든 것은 간단, 극히 간단했다. 쓰는 게 아니라 받아 적는 것이었다. 연민과 거부와 대기로 이루어진 전 세계가 내 앞에 나타났다. 붓다의 집, 후궁의 여인들, 황금 마차, 세 번의 숙명적인 만남(늙은 자와 병든 자와 죽은 자), 출가, 금욕 생활, 포교, 해탈. 땅은 노란 꽃으로 뒤덮였다. 가사를 입은 왕자들과 거지들, 나무와 육신은 가벼워졌다. 영혼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정신이 되었으며, 정신은 무(無)가 되었다…. 손가락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멈출 수도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환상은 살같이 지나가며 사라졌다. 나는 그 환상을 따라잡아야 했다.

 아침에 조르바는, 원고에다 머리를 처박고 자는 나를 깨워야 했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뭇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바위 위에 앉아 새해 아침을 생각했다. 그 불쌍한 나비라도 내 앞에서 몸을 뒤척이며 내가 갈 길을 일러 준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 보니 조르바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추워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머리 위로 손을 뻗치고 서가에서 좋아서 갖고 다니넌 책 한 권을 뽑아내었다. 말라르메의 시집이었다. 천천히 마음 내키는 대로 읽었다. 읽다가 책을 닫았다가 다시 펼쳤다. 그러다 나는 결국 그 책을 놓고 말았다. 그의 시는 핏기도 없고 냄새도 없고 인간의 본질을 비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경험한 느낌이었다. 그의 시가 창백한 진공 속의 공허한 언어로 보였던 것이다. 박테리아 한 마리 없는 완벽한 증류수였지만 영양분 역시 하나 없는 물 같은 것, 요컨대 생명이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창조의 섬광을 상실한 종교에서 제신(諸神)은 결국 인간의 고독과 벽면을 치장하는 시적 모티프나 예배 용품으로 전락했다. 말라르메의 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지와 씨앗을 품은 심장의 열화 같은 호흡이 완벽한 지적 놀음, 교묘하면서도 덧없는 구조물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나는 다시 시집을 열고 읽어 보았다. 이런 시들이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순수시! 인생은 한 방울의 피도 방해할 수 없는 밝고 투명한 놀음이 되어 있었다. 인간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육체와 불만의 호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보라.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연금술의 과정을 좇아 순화시키고 증발시켜 보라.

 전에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시편들이 그날 아침에는 느닷없이 지적인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문명의 사양(斜陽)은 그렇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인간의 고뇌는 정교하게 짠 속임수(순수시, 순수 음악, 순수 사고) 속에서 그렇게 끝나기 마련인 것이다. 최후의 인간(모든 믿음에서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그래서 기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진)은 자신의 원료가 되어 정신을 산출한 진흙이며, 이 정신이 뿌리내리고 수액을 빨아올릴 토양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인간이다.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저건 불가리아 놈, 이건 그리스 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 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때로 자신을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염병할 놈, 지옥에나 떨어져, 이 돼지 같은 놈! 싹 꺼져 버려. 이 병신아!>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다 놓고 맹세합니다만)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중략)"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두목,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는 매일 죽음을 생각해요. 죽음을 응시하지만 무섭지는 않아요. 그러나 좋아한다고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좋아하다니 어림도 없지. 나는 좋아한다고 말했다는 데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조르바는 또 말을 끊었다가 다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렇다고 양처럼 제 목을 쑥 삼도천의 뱃사공에게 내밀고, <여보쇼, 카론 씨, 이것 좀 잘라 주게> 이렇게 소리칠 만큼 얼빠진 놈도 아닙니다. 나는 천당으로 직행하고 싶어요."

 나는 조르바의 말을 듣고 당황하고 말았다. 법이 명하는 대로 자진해서 행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현자가 누구였던가? 필연에 순응하고 필연적인 것들은 자유 의지의 행위로 바꾸어 놓으라고 한 사람은? 이게 해탈이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비참한 방법이지만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조르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내가 오기를 부렸다. 조르바의 말이 정통으로 내 상처를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는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 이 잡것이!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노란 카밀레 맛이지.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아니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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