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y Hand DEEZ

 

 단편 소설 모음집인 줄 모르고 읽었다. 호로록 읽어 넘길만한 중장편 소설 한 권을 읽어볼까 하고 집었는데, 몇 페이지도 넘기지 않아서 이야기가 툭 끝나버리는 바람에 적잖이 당황했지... 덕분에 호로록까지도 안 가고 호롭 해버렸다... 앞으로는 책 설명 좀 잘 읽어보고 사야지.

 

 사람들 저마다의 기운이 모여 항상 뜨거운 활기를 품고 있을 것만 같고, 아무 문제 없이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 속에서. 어떤 이들은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거나, 직장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심지어는 인류 전체라는 거대한 집단으로부터 상처를 받아 슬퍼하고 좌절하고 있다. 이 소설집은 그런 사람들의 아픔을 다룬다. 책 표지부터 왠지 우울한 분위기가 풍겨오긴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어두울 줄은 몰랐는데... 다 보고 나니 마음이 안 좋다.

 

 내가 기억하려고 써놓는 줄거리. 당연히 스포 있음.

 

입동: 어린이집 버스 사고로 고작 오십이 개월 된 영우를 잃은 가족의 슬픔.

 

노찬성과 에반: 에반이라는 노견을 키우며 에반과 점점 가까워졌는데 어느 날부터 에반이 이상해짐. 암이었고 찬성은 안락사를 시켜주기 위해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음. 근데 할머니께서 구해다 주신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거기에 빠져 에반을 잠시 신경 써주지 못했고 그 와중에 에반이 차로 뛰어들어 죽음.

 

건너편: 공시생 때 만난 오래된 연인 이수와 헤어지는 도화.

 

침묵의 미래: 세상에 혼자 남아 박물관에 갇히게 된 소수 언어 부족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풍경의 쓸모: 어릴 적 아버지는 여자가 생겨 가정을 버렸고, 정우는 대학 강사가 되어 교수 임용을 기다리며 아등바등 살아감. 근데 다른 정교수의 교통사고를 얼결에 뒤집어쓰게 되고 그 교수에게 밉보여 승진을 못함.

 

가리는 손: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란 재이는 중학생 노인 폭행 사건의 목격자가 되고, 재이의 엄마는 재이의 멘탈을 걱정함. 그러면서도 재이가 놀라서 입을 가린 손안에 혹시 웃음이 서려있었던 건 아닐까 의심함.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교사였던 남편이 제자를 구하려다 죽고 홀로 남은 명지의 이야기.


[문장 옮기기]

 

<건너편>

 

 이날 두 사람은 평소보다 달게 잤는데, 저녁상에 오른 나물 덕이었다. 도화는 밤새 내장 안에서 녹색 숯이 오래 타는 기운을 느꼈다. 낮은 조도로 점멸하는 식물에너지가 어두운 몸속을 푸르스름하게 밝히는 동안 영혼도 그쪽으로 팔을 뻗어 불을 쬐는 기분이었다. 잠결에 자세를 바꾸다 도화는 속이 편하다는 느낌을 몇 번 받았다.

 - 제철 음식이라 그런가.

 도화가 간밤 편안함을 설명하자 이수가 도화 쪽으로 몸을 틀며 호응했다. 도화는 새삼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는데, 직업상 비 올 확률이라든가 바람의 세기, 적설량에 민감한 도화에겐 요즘 들어 '제철'이 다 사라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당장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오늘만 해도 그랬다. 기상청에서 예보한 최저, 최고 기온 모두 영상을 크게 웃돌았다. 일본 어느 도시에서는 벚꽃이 피었다 하고, 뉴욕 한낮 기온도 십팔 도를 넘었다 했다. 여러모로 올겨울은 겨울 같지 않았다. 파이프에서 물이 새듯 미래에서 봄이 새고 있었다.


<풍경의 쓸모>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가리는 손>

 

 오래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자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병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핸드폰 도우미 이야기를 들으니 아이가 속한 세상이 염려되지만 참고 내색 않는다. 애가 어릴 땐 집 현관문을 닫으면 바깥세상과 자연스레 단절됐는데. 지금은 그 '바깥'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하는 모양이다. 아직까진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모바일 게임을 하고, 실시간 인터넷 방송을 즐겨 보는 정도 같지만, 가끔 아이 몸에 너무 많은 '소셜'이 꽂혀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온갖 평판과 해명, 친밀과 초조, 시기와 미소가 공존하는 '사회'와 이십사 시간 내내 연결돼 있는 듯해. 아이보다 먼저 사회에 나가 그 억압과 피로를 경험해본 터라 걱정됐다. 지금은 누군가를 때리기 위해 굳이 '옥상으로 올라와'라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이니까. 아이가 지금 나와 식사를 하는 중에도 실은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얻어맞으며 피 흘릴지 몰랐다. 재이는 틀림없이 이런 나를 고루하다 할 테지만.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한국에 있을 때보다 혼자라는 느낌은 덜했다. 남편을 잃기 전, 나는 내가 집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잘 몰랐다. 같이 사는 사람의 기척과 섞여 의식하지 못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내가 끄는 발 소리, 내가 쓰는 물 소리, 내가 닫는 문 소리가 크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중 가장 큰 건 내 '말소리' 그리고 '생각의 소리'였다. 상대가 없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 어색하게 맴돌았다. 두 사람만 쓰던, 두 사람이 만든 유행어, 맞장구의 패턴, 침대 속 밀담과 험담,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던 잔소리, 농담과 다독임이 온종일 집안을 떠다녔다. 유리벽에 대가리를 박고 죽는 새처럼 번번이 당신의 부재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야 나는 바보같이 '아, 그 사람, 이제 여기 없지……'라는 사실을 처음 안 듯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