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y Hand DEEZ

 

 여름 특별 한정판이라며 동화 같은 삽화로 표지를 바꾸어 새로 출간한 이 시집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보자마자 소장 욕구가 뿜뿜했고 정신 차리니 내 손은 이미 결제 버튼을 누른 후였다. 평소 시집을 즐겨 읽지도 않았을뿐더러 특히 양장본은 딱딱한 느낌이 싫어서 웬만하면 피하던 나지만, 이 시집만큼은 예외였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의 '풀꽃'이라는 시다. 이 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짧고도 포근한 이 시는 나 또한 문단 나눔까지 외우고 있었고, 이 시로 나태주 시인을 처음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풀꽃 외에는 나태주 시인의 작품을 아는 것이 한 편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로 그의 시를 다수 접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태주 시인 등단 50주년을 기념하여 이 책엔 200편이 넘는 그의 시가 수록되어 있었다.

 

 나태주 시인은 사랑을, 계절을, 자연을, 인생을 노래했다. 그는 뼛속까지 서정주의 시인이었다. 귀엽고 따스한 그의 문장들을 찬찬히 음미하다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시구가 대체로 짤막하고 어려운 단어가 없어서 막힘 없이 시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 감성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시는 여운을 느껴야 하므로 하루에 두 편 이상을 읽지 말라고 배웠지만, 쉽게 술술 읽혀서 이미 작품 해설 페이지까지 가버린 걸 나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루가 고달파서 위로받고 싶은 날 나태주의 시를 읽어보길 강력히 추천한다.


[마음에 들었던 시편]

* 분홍색 표시는 특히 더 좋았던 것

 

  주유천하  

 

저기 꽃이 있구나

예쁜 꽃이 있구나

그렇게 바라보면서

나도 꽃이 되고

예쁜 사람이

되기만 하면 된다

 

저기 여자가 있구나

저기 우람한 산 하나

산을 감도는 강물이 있구나

드넓고 기름진 들판

그 위에 구름도 떴구나

그렇게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들을 굳이 내 품 안으로

끌어들일 일은 없다

더구나 그것들을 훔치듯

가방에 쑤셔 넣어

내 집으로까지

데리고 올 까닭은 없다

 

그러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 되고

심지어는

쓰레기가 되기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잘되었다  

 

그가 그 길에서

망하기를 바라면서

잘되었다

말하는 사람

 

그가 정말 그 길에서

잘 되기를 바라면서

잘되었다

말하는 사람

 

그가 그 길에서

자기의 일을 해주기를

바라면서 잘되었다

말하는 사람

 

정말로

어떤 잘되었다가

잘된 잘되었다인가?


  서점에서  

 

서점에 들어가면

나무숲에 들어간 것같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딘가 새소리가 들리고

개울 물소리가 다가오고

흰 구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서점의 책들은 모두가

숲에서 온 친구들이다

 

서가 사이를 서성이는 것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서성이는 것

책을 넘기는 것은

나무의 속살을 잠시 들여다보는 것

 

오늘도 나는

숲속 길을 멀리 걸었고

나무들과 어울려 잘 놀았다.


  따로국밥  

 

따로국밥은 서민적인 음식

뚝배기 하나에 국물을 넣고 밥을 말아주던

시장 국밥에서 조금쯤 여유를 부린 음식

밥 한 그릇 따로 국 한 그릇 따로여서 따로국밥

 

그렇지만 나에게는 서러운 음식

신혼 시절 외지에 나가 선생 할 때

따로국밥 두 그릇 값이 없어

국밥 냄새를 피하여 저녁 산책길

멀리멀리 국밥집을 피해서 걷던 발길

 

젊은 아내와 젊은 나의

비척이던 발길이 들어 있는 음식

밥집 멀리 돌아서 가던

서러운 저녁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음식

 

오늘도 나는 그리운 마음으로

해거름 녘 어슬어슬 저녁 그림자 앞세워

따로국밥 한 그릇 혼자서 청해서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서가의 책들  

 

저것들은 본래 내

호주머니 속의 용돈이었다

 

우리 아이들 과잣값이 되어야 하고

아내의 화장품값이 되어야 하고

음식값이 돼야 했을 돈들이

어찌어찌 바뀌어 저기에 와

앉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다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는 이렇게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멍하니 마주 보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가을은 쓸쓸한 나에게  

 

가을은 쓸쓸한 나에게

더욱 쓸쓸해하라고

 

혼자 걸어가는 여자의

바바리코트를 보여주고

 

길가에 떨어져 빗방울에 밟히는

은행잎을 보여주고

 

길게 길게 저물어 사라지는

언덕의 노을을 보여줍니다

 

가을은 쓸쓸한 나에게

더욱 쓸쓸해하라고.


  촉감  

 

발뒤꿈치 꺼끌거리니

올해도 가을 지나

겨울이 왔나 보다.


  바람에게 묻는다  

 

바람에게 묻는다

지금 그곳에는 여전히

꽃이 피었던가 달이 떴던가

 

바람에게 듣는다

내 그리운 사람 못 잊을 사람

아직도 나를 기다려

그곳에서 서성이고 있던가

 

내게 불러줬던 노래

아직도 혼자 부르며

울고 있던가.


  꽃들아 안녕  

 

꽃들에게 인사할 때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

한꺼번에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꽃들아 안녕!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

백번 옳다.


  아끼지 마세요  

 

좋은 것 아끼지 마세요

옷장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옷 예쁜 옷

잔칫날 간다고 결혼식장 간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철 지나면 헌 옷 되지요

 

마음 또한 아끼지 마세요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랑스러운 마음 그리운 마음

정말로 좋은 사람 생기면 준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마음의 물기 마르면 노인이 되지요

 

좋은 옷 있으면 생각날 때 입고

좋은 음식 있으면 먹고 싶을 때 먹고

좋은 음악 있으면 듣고 싶을 때 들으세요

더구나 좋은 사람 있으면

마음속에 숨겨두지 말고

마음껏 좋아하고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그리하여 때로는 얼굴 붉힐 일

눈물 글썽일 일 있다한들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지금도 그대 앞에 꽃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지 않나요

그 꽃을 마음껏 좋아하고

그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봄  

 

봄이란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아직은 겨울이지 싶을 때 봄이고

아직은 봄이겠지 싶을 때 여름인 봄

너무나 힘들게 더디게 왔다가

너무나 빠르게 허망하게

가버리는 봄

우리네 인생에도

봄이란 것이 있었을까?


  묘비명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어머니 말씀의 본을 받아  

 

어려서 어머니 곧잘 말씀하셨다

얘야, 작은 일이 큰일이다

작은 일을 잘하지 못하면 큰일도 잘하지 못한단다

작은 일을 잘하도록 하려무나

 

어려서 어머니 또 말씀하셨다

얘야, 네 둘레에 있는 것들을 아끼고 사랑해라

작은 것들 버려진 것들 오래된 것들을

부디 함부로 여기지 말아라

 

어려서 그 말씀의 뜻을 알지 못했다

자라면서도 끝내 그 말씀을 기억하지 않았다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얼른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하루 한 날도

평화로운 날이 없었고 행복한 날이 없었다

날마다 날마다가 다툼의 날이었고

날마다 날마다가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이제 겨우 나이 들어 알게 되었다

어머니 말씀 속에 행복이 있고

더 할 수 없이 고요한 평안이 있었는데

너무나 오랫동안 그것을 잊고 살았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 젊은 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다

작은 일이 큰일이니 작은 일을 함부로 하지 말아라

네 주변에 있는 것들이며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라

어머니 말씀의 본을 받아 타일러 말하곤 한다

 

지금껏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보다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목을 매고 살았다

기를 쓰고 무엇인가를 이루려고만 애썼다

명사형 대명사형으로만 살려고 했다

 

보다 많이 형용사와 동사형으로 살았어야 했다

남의 것을 부러워하기보다는 내 것을 더 많이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살았어야 했다

내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를 처음부터 알았어야 했다

 

당신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애당초 그것은 당신 안에 있었고

당신의 집에 있었고 당신의 가족, 당신의 직장 속에 있었다

이제부터 당신은 그것을 찾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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