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y Hand DEEZ

 

 

 지난달 정유정 작가님의 신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내가 아직 전작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바보 같은 사실을 깨닫고 바로 주문해버린 책이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정유정 작가님의 소설이라면 놓치지 않고 챙겨 읽고 얼른 다음 작품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짱팬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는데, 성인이 되고서부터 책이랑은 인연을 놓아버렸더니 이런 일이... '진이, 지니'를 다 봤으니까 이번에 써 주신 '완전한 행복'도 어서 사 읽어야겠다.

 

 진이는 콩고 킨샤사에서 불법 포획된 보노보 '지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 때문에 영장류센터에서 연구하는 것을 관두고 독일로의 유학을 결심했다. 그런데 독일로 떠나기 몇 시간 전, 구조대의 요청으로 인동호의 현장에 출동했다가 지니를 다시 마주했고 지니를 구조하고 돌아오던 길에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를 당한다. 이와 동시에 진이의 영혼이 지니의 몸속으로 들어가 보노보의 몸에서 두 영혼이 교차하게 된다.

 

 한편 한 사람의 구조 요청 신호를 무시했다가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 트라우마를 겪고 있던 민주는 진이의 사고 현장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민주는 자신은 그릇이 작으니 남 일엔 신경 끄고 살자고 생각해왔지만, 이번엔 간장 종지를 탈피해 구조 신호를 따라가 진이 일행의 교통사고를 119에 신고한다. 그리고 진이가 지니의 몸에서 벗어나 자신의 육체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돕는다.

 

 처음엔 이 무슨 뜬금없는 판타지인가 싶었지만, 진이가 보노보의 몸속에서 지니의 시점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감정을 느끼는 것을 지켜보면서 동물을 하나의 생명체로서 존중하고 소중히 대하는 따뜻한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거의 초주검이 된 자신의 육체를 두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지니 속에 머물지 않고 곧 끝날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진이의 용기와 지니에 대한 애틋한 배려심에 감동했다.

 

 등장인물도 몇 되지 않는 단순하고 간결한 이야기였지만, 정유정 작가님 특유의 속도감과 진진한 몰입력 덕분에 삶을 다루는 따뜻한 이야기도 이렇게 무겁지 않고 흥미롭게 풀어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각자의 트라우마를 극복해나가는 성장 스토리도 보는 이를 흐뭇하게 만들어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게 한 요소였다. 진이의 선택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활기를 띠고 생생해졌다면 얼토당토않는 극적인 변화가 시시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일 없이 담담하게 서술한 결말이라 더 마음에 들었다. 진이와 민주의 사흘간의 진한 우정도 마음이 벅차서 좀체 잊지 못할 것 같다.


[문장 옮기기]

 

(진이, 지니)

 '눈동자의 말'은 주로 배가 고프거나, 상처가 났거나, 위험에 처했거나, 곤경에 빠진 동물들이 보내오는 신호였다. 때로는 평화로운 침팬지관에서도 들린다. 그들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을 잘 안다고 말한다.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가 인간이라는 점도 안다고 말한다. 싫고 무서워도, 자신이 살려면 인간으로 하여금 손을 내밀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서늘하고 처연한 말이 나를 사육사로 만들었고, 사육사를 그만두게도 만들었다.


(진이, 지니)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눈, 일그러지는 입술, 짧은 머리칼, 부서지는 차창, 갈라지는 이마, 얼굴을 뒤덮은 선혈. 꿈속의 나는 주체자가 아니었다. 피사체였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사고의 순간, 내가 뭔가를 볼 수 있었다면 그건 지니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꿈에서는 본 적도, 볼 수도 없었던 내 얼굴이 나타났을까.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가 주인공이어야 하는 사람이 있긴 하다. 나 역시 내가 주인공인 상황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시점을 바꿀 만큼 주인공 선망증을 앓고 있지는 않았다. 오컴의 면도날 법칙에 따르면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내 꿈이 아니었다. 지니의 꿈이었다. 나는 지니의 머릿속에서 지니의 꿈을 관람한 것이었다. 가능하거나 말거나, 그게 정답이었다.

 필연적인 질문이 뒤따라왔다. '진이의 몸'은 어디에 있는가. '지니의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앉아 질문을 던지고 있는 존재가 지니의 몸에 깃든 진이의 정신이라면, 나는 지니인가, 진이인가. 질문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가. 아니라면 이것은 꿈인가? 망상인가?

 넌덜머리가 났다. 끝없이 도는 질문의 순환 열차에 승차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복도로 뛰쳐나가 아무 방문이나 열어젖히고 애걸복걸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혹시 지난밤 사고에 대해 들은 게 있느냐고. 들었다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내가 죽지 않았다고 말해달라고. 나를 내게로 데려가달라고.


(민주)

 배낭에서 세면도구를 꺼내 들고, 나는 물길로 내려갔다. 징검돌에 쪼그려 앉아 양치를 하고 얼굴을 씻었다. 진흙이 들러붙은 신발 밑창도 씻었다. 나무 냄새와 안개 냄새가 감도는 공기를 뱃속 깊이 들이마셨다. 바짝 말랐던 위장이 눅신하게 젖는 기분이었다. 돌연하게 허기가 되살아났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 갠 아침 하늘 한복판으로 새털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숲은 신록으로 창창하고 물길 위에선 은빛 햇살이 튀어올랐다. 만개한 봄이었다. 허기지고, 할 일 없고, 막막한 아침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일단 정자에서 나가야겠지. 이 골짜기가 자살을 꿈꾸는 자의 무지개다리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 살겠다는 마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박령 소굴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내려오지 않았다면 지난밤 교통사고를 목격하지도 않았으리라. 딱 한 번, 그것도 아주 잠깐 마주친 다정한 그녀 때문에 잠을 설치지도 않았을 테고.


(민주)

 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를 하려다 아슬아슬하게 걸린 브레이크를 푸는 꼴이 될까봐. 대신 놈이 내게 이러는 이유를 추측해봤다. 나를 올라타고 싶어서는 아닐 것이다. 스스로 평가하건대, 나는 보노보까지 반해서 덮칠 만큼 잘생기지는 않았다. 혹시 사는 게 심심해서 이러는 것일까. 하필 그럴 때 내가 여기 있었던 걸까?

 놈은 나를 내려다보더니 앙다문 입술 위에 검지를 똑바로 세웠다. 이어 내 눈앞에 종주먹을 들이댔다. 이는 누구라도 해독 가능한 인류 공통의 몸짓언어였다.

 '입 닥쳐. 강냉이 털리기 전에.'

 나는 얼이 반쯤 빠졌다. 금방 뭘 봤을까. 이해를 해보고자 한 가지 가설을 세워봤다.

 '이놈은 인간의 몸짓언어를 읽고 답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둘 사이에서 대장이 누군지는 이미 판가름 난 상태였다. 나로서는 놈을 제압하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남은 길은 이 가차 없고 교활한 놈과 우호적 분위기를 구축하는 것뿐이었다. 경계심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벗어날 기회도 오겠지. 임진왜란 난리 통에도 간신들은 유연하게 살아남지 않았던가.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면서.

 나는 눈꺼풀을 한 번 깜박거렸다. 가설에 기초한 대응이었다. 이미 닥치고 있잖아.


(민주)

 나도 다리를 세우고 마룻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싶었다. 놈은 오리걸음으로 다가와 내 곁에 붙어 앉았다. 박자가 제법 잘 맞았다. 놈이 검지 손톱으로 밑그림을 그리면 내가 네임펜으로 색을 입혔다. 노트북용 한글 키보드가 완성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험 삼아 좋아하는 소설의 첫 문장을 쳐봤다.

 "러시아에서의 주검은 아프리카에서의 주검과는 전혀 다른 냄새를 풍긴다."

 문자키 위치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기능키와 기호키 위치도 얼추 맞는 듯했다. 놈은 내 손을 밀어내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검지 끝마디를 써서 독수리 타법으로. 나는 머릿속으로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며 놈의 손끝을 시선으로 따라갔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레마르크.'

 나는 보노보의 포로가 된 내 처지를 잠시 잊었다. 틈을 봐서 도망쳐야한다는 당면 과제도 잊어버렸다. 충격에 가까운 혼란이 그 자리로 밀고 들어왔다. 60여 년 전의 소설을 알고, 제목과 첫 문장과 작가를 기억하는 보노보라니. 분당 400타의 타자 속도로 친 문장을 읽어낸 동체 시력 또한 놀라웠다. 이 혼란을 정리하려면 논리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놈은 인간이 하는 일은 다 할 수 있다.'

 놈은 새로운 문장을 쳐 보였다.

 '네 눈엔 내가 어떻게 보여?'

 연달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유의 질문을 하는 게 가능한가. 제아무리 머리가 좋다 해도 결국 보노보인 것을. 자기 이미지에 대한 궁금증은 인간이라는 종 특유의 호기심이 아니었나?


(민주)

 이제 와 드는 생각이지만, 다정한 그녀의 눈은 35년이라는 생물학적 시간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눈이었다. 삶에 단련된 자 특유의 무덤덤한 눈이었다. 나로서는 일흔 살이 돼도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단단한 눈이었다. 다정한 그녀 앞에서 주눅이 들었던 건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강철처럼 검푸르던 그 눈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하자 등허리 밑으로 이상한 한기가 퍼졌다. 해병대 할아버지를 발견했을 때 느낀 한기, 고갯길 위에서 그녀의 스승이 정신을 놔버렸을 때 느꼈던 바로 그 한기.


(진이, 지니)

 팬이 침팬지 무리에 받아들여지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나는 스물세 살 봄에야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동물원을 떠나던 아침, 때늦은 눈이 내렸다. 그곳에 도착하던 날처럼 나폴나폴 내리는 함박눈이었다. 팬은 눈 쌓인 야외 놀이터에서 홀로 그네를 타고 있었다. 까맣고 작은 머리 위로 눈송이들이 흰 나비처럼 날았다. 그 모습이 너무 쓸쓸하고 애처로워 하마터면 팬, 하고 불러버릴 뻔했다. 나는 손가락 총을 세우고 입속말로 인사를 보냈다. 잘 있어,라고 했던가. 아니 안녕,이라고 했던가. 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팬의 모습이 저만치 멀어졌다. 기억들이 함박눈처럼 흩어졌다. 이후 다시 맞춰지지 않았다. 어떤 생각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의식이 흐르는 대로 끌려다녔다. 기억에서 꿈으로, 꿈에서 환각으로, 환각에서 다시 기억으로 무한궤도를 돌았다. 때문에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민주의 목소리도 환청인 줄로 알았다.


(진이, 지니)

 나는 검은 장막을 뚫고 침투해오는 파인애플 향을 맡았다. 머릿속이 한숨에 헝클어졌다. 파인애플 향만큼이나 강렬한 기시감이 나를 덮쳤다. 설마 하는 사이 검은 장막이 걷혔다. 정면에서 눈부신 백광이 터졌다. 지니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으나 빛의 공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섬광이 칼날처럼 눈을 가르고 지나갔다. 시야는 백색으로 암전됐다. 백색 어둠 너머에선 다시 천둥이 으르렁댔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몇 초가 지나갔다. 그사이 빛의 중심이 시야 옆으로 비스듬하게 이동했다. 비로소 손가락 사이로, 희끄무레한 물체가 내다보였다. 처음에는 무언지 모를 만큼 희미하게. 잠시 후, 사람의 얼굴이라는 걸 알만큼 또렷하게. 지니는 손을 내렸다. 쇠창살 너머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젖은 머리칼만큼이나 까만 눈으로 지니를 바라봤다. 한 손에 플래시를 켠 휴대전화를, 다른 손에는 파인애플 꼬치를 들고.

 그녀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몸을 낮췄다. 지니와 눈을 맞대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지니의 귀를 거친 말은 낮게 뭉뚱그려진 잡음으로 전환돼 내게 닿았다. 그런데도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아니다. 알아들은 게 아니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정확한 말이겠다.

 "나는 진이야, 이진이."

 지니는 창살 사이로 턱을 내밀었다. 나는 지니의 얼굴을 더듬는 내 눈동자의 움직임을 멍하니 마주 봤다. 반복적으로 울리는 '진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름에서 새콤하고 달착지근한 파인애플 냄새가 났다. 이름과 냄새가 하나의 기억으로 통합되는 순간이었다. 파인애플의 냄새가 진이의 냄새로.

 거의 자동으로 인동호의 기억들이 불려나왔다. 낚싯대에 꿴 파인애플과 내 목소리, 나뭇잎 사이로 조심스레 시선을 맞춰오던 지니의 눈, 나무에서 미끄러지는 나를 향해 뻗어오던 지니의 손.

 갑자기 시야가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현기증이 덮치는 것처럼 머릿속이 컴컴해졌다. 내 것도 아닌 손이 바들바들 떨려오는 느낌이었다. 왜 몰랐던가 왜 여태 의심해보지 않았던가.

 인동호에서, 나는 스스로 물었어야 했다. 지니가 왜 내 이름에 반응을 보이는지, 왜 그토록 빨리 경계심을 푸는지, 왜 의심 없이 파인애플을 받아먹는지, 왜 그리도 친밀하게 눈을 맞춰오는지, 왜 손을 뻗어서 나무에서 떨어지는 내 손을 붙잡았는지.

 그때 못했다면, 후에라도 짚어봤어야 했다. 그 모든 일이 밀림에서 자란 보노보, 그것도 적대적 상황에 내몰린 야생 보노보가 낯선 인간에게 보일 수 있는 보편적 행동인지, 아닌지. 우습게도 나는 그것이 내 교감 능력의 결과인 줄 알았다. 어리석게도,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진짜 이유를 알아차린 거였다.

 이곳은 킨샤사였다. 지니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진이라는 이름을. 내 얼굴과 목소리와 파인애플 향을.


(진이, 지니)

 갑자기 어떤 깨달음이 왔다. 지금껏 나는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걸그룹의 노래도, 춤 선생의 말도. 통역 시차 같은 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인지되고 자동으로 해석됐다. 예상에서 어긋난 부분이었다. 내가 지니의 언어를 알아듣는 게 아니라, 지니가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게 된 모양이었다.

 나아가 인지 방식에 비약적인 변화가 있었다. 지니의 자아를 감지해내는 수준에서 내 자아와 지니를 동일시하는 단계로 한숨에 도약해버렸다. '지니가 춤을 춘다'를 '내가 춤을 춘다'로, 지니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지니의 절망을 내 절망으로 느꼈다. 나와 지니라는 두 개체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사이에 남은 것은 '동일시를 인식하고 당황하는 나'뿐이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충격을 받았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던 것, 지금껏 겪어온 '변화'의 최종 단계,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넣고 덮어버린 진실이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곧 나는 '교통사고'라는 출발점에 도착할 것이다. 지금껏 지나온 행로로 보아 램프의 사이클이 완결되는 지점이었다. 지금까지 겪어온 변화의 추이로 보자면 그땐 피아의 구분마저 불가능한 '동화'에 이를 듯했다. 지금처럼 퍼뜩 나를 자각하는 순간마저 없을 터였다. 유인원과 인간이 하나로 동화된 완전체 호미노이드의 탄생을 목전에 둔 셈이었다.


(진이, 지니)

 운명은 우리 둘 사이에서도 공평하지 않았다. 지니에겐 선택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지니의 몸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나는 지니의 삶에 쳐들어온 침입자였다. 지니에게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입이 있다면 나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너는 내게 왜 이러느냐고.

 내가 의도했느냐, 아니냐는 그에 대한 답이 되지 않았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도 그다음 문제였다. 나는 타당성에 대한 답을 해야 했다.

 램프는 이제 종착역으로 가고 있었다. 다음번엔 미루나무 위에서 시작해 교통사고의 순간에 끝날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해 이 부교 위까지 왔으니까. 그땐 램프가 닫힐 것이고, 그마저 닫히면 선택할 기회도 영원히 사라지게 될 터였다. 지금껏 지니는 램프를 통해 침입자에게 호소해온 것이다. 삶의 타당성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자신의 삶을 자신에게 돌려달라고.

 예상이 맞는다면 램프가 닫히는 순간 내 몸은 물리적 죽음을 맞을 것이다. 만약 내가 지니의 삶을 훔치기로 한다면 내 죽음에는 주검만 남게 될 터였다. 진이로 살아온 내 삶의 의미를 스스로 저버리는 짓이었다. 지니는 나와 정반대 쪽에 서 있었다. 몸은 살아 있되 영혼은 죽음을 맞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내 죽음과 지니의 삶이 모두 무의미해지는 선택이었다.

 나는 내게 돌아가야 했다. 다음 교차가 오기 전에, 내 몸이 엔진을 완전히 멈추기 전에, 지니에게 지니의 삶을 돌려줘야 했다. 그것이 타당한 선택이었다. 나아가 지니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지니가 떠아온 곳. 나고 자란 자신의 세계, 밀림 속으로. 이는 내가 수행해야 할 삶의 마지막 의무였다.

 그런데도, 알면서도, 겁이 났다. 이 세상에 내가 부재하게 되리라는 사실보다 작별이 무서웠다. 내 삶에서 유일무이하고 전적인 존재, 나 자신과 헤어지는 게 미치도록 무서웠다. 다시는 나로서 생각하고, 나를 의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지니 앞에 엎드려 애원해서라도, 살고 싶었다. 너의 생을 내게 양보해달라고 떼를 써서라도 살고 싶었다. 그것은 내 안, 가장 깊은 바닥에서 울리는 본성의 목소리였다.


(진이, 지니)

 "노래 하나 불러도 돼?"

 노래라면 조금 전 램프에서 넌덜머리 나게 들었다. 민주의 노래라면 더욱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야상 주머니에서 이상한 안경을 꺼내 끼더니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내가 거부 의사를 나타내기도 전에, 예의 현란한 노래 솜씨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생일…이라고.

 

 나의 친구 진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그는 노래를 끝내고 짠, 하듯 나를 돌아봤다. 그의 눈에 토끼 얼굴 모양의 장난감 안경이 붙어 있었다. 안경테 양쪽 윗부분엔 귀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고, 귀와 귀 사이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Happy Birthday

 

 그는 양쪽 손가락 두 개를 귀 옆으로 들어올려 토끼처럼 깐닥거렸다.

 "생일 축하해."

 안경 뒤에서 그의 눈이 웃고 있었다. 차마 눈 뜨고는 봐줄 수 없는 '귀여운 짓'이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콧날이 벌에 쏘인 것처럼 아파왔다. 눈두덩이 뜨뜻해지고 목이 꽉 조여들었다. 깜박 잊고 있었다. 35년 전 오늘, 내가 태어났다는 걸. 이 사소한 일을 축하해줄 사람이, 나를 '나의 친구 진이'라고 불러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도 미처 몰랐다.


(민주)

 세 번째 문단의 수신자는 나였다.

 

 민주에게

 뻔뻔하고 염치 없는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결국 채무이행을 못하게 되었다고. 방법이 없었어.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마저 하지 못했어. 하나 마나 한 생각이 자꾸 떠올랐어. 떠나기 전에 신이 내게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게 허락해준다면, 그러니까 '다정한 그녀'의 목소리로 한마디만 말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러면 나는 내 친구의 이름을 불러볼 텐데. 가만히, 입속말로.

 김민주…라고.

 추신: 나와 지니는 오래오래 너를 기억할 거야. 네 형편없는 노래도.

 

 나는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마지막 문단을 읽었다. 미리 이 편지를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떠나기 전에 말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너는 내게 늘 '다정한 그녀'였으며 네가 부르는 내 이름을 이미 여러 번 들었다고. 원한다면 언제라도 노래를 들려주겠노라고.


(민주)

 "저기 이거…"

 나는 주머니에서 진이의 사원증을 꺼내 장 교수에게 내밀었다.

 "지니에게 주고 싶은데요."

 장 교수는 사원증을 받아들고 들여다봤다. 진이의 기록을 읽었으니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을 터였다.

 "직접 줘보게."

 사원증은 내게로 돌아왔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볼까. 내 선물을 받아줄까. 나는 지니의 정면으로 다가섰다.

 "지니, 안녕."

 지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발그레하고 얇은 윗입술은 뾰족하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 나는 사원증을 들어올려 내 목에 걸었다. 그런 다음 다시 벗었다. 두어 번 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지니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성급한 손은 이미 케이지 밖으로 뻗어나와 있었다. 나는 손가락 끝에 사원증을 걸어주며 말했다.

 "이제 네 거야."

 지니는 사원증을 쥐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마침내 목에 걸었다. 어때,라고 묻는 것처럼 흘끔 나를 봤다.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 선생이 뒤에서 말했다. 장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짝 물러섰다. 나는 지니에게 작별 인사를 보냈다. 손가락 총을 세워 케이지 창살 앞에 대고, 진이의 방식으로.

 "잘 가, 지니."

 순간, 사원증에 정신이 팔려 있던 지니가 멈칫했다. 머뭇머뭇 제 손을 들어올리더니, 검지를 길게 펴고 내 손과 제 손을 번갈아 쳐다봤다. 잠시 후, 엄지를 세워 손가락 총을 만들었다. 이제 기억이 난다는 듯 나를 향해 검지를 깐닥거렸다. 한 번, 두 번. 나는 멍하니 서서 모차르트가 전하는 말을 들었다.

 '안녕, 민주.'


(민주)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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