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y Hand DEEZ

 

 

 문장력이 특별히 뛰어나다고 느낀 책은 아니었다. 섬세하고 감성적인 심리 묘사는 드물었고 이야기는 담백하게 사건과 상황 위주로만 흘러갔다. 그럼에도 스토리에 온전히 몰입해서 끝까지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재깍재깍 장면을 전환했고, 조금 루즈해진다 싶을 때마다 반전 요소를 끼워넣어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비원과 경선산성, 그리고 섹션의 삼각 대칭 구도가 팽팽하게 이어져서 언제 누가 뒤통수를 칠지, 일을 터뜨릴지를 지켜보며 쫄깃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도심 속에 거대한 싱크홀이 발생하면서 싱크홀에 빠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현상이 나타났다. 이 소설은 그 사람들 중 몇백 명이 싱크홀 위로 살아 돌아오면서 시작된 SF 이야기다. 사고로 얻게 된 초능력을 이용해 물체를 부수고, 정지시키고, 복원할 수 있게 된 이른바 파쇄자, 정지자, 복원자들은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 두 무리로 갈라진다. 이경선을 필두로 한 경선산성과 최주상을 앞세운 비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둘과 은밀히 연락하면서도 둘을 모두 없애고자 하는 조직이 바로 섹션.

 

 싱크홀의 생존자 윤서리가 수사관이 되어서 범죄조직 비원의 비밀을 캐다가, 섹션 수장 서형우의 지령을 받고 경선산성으로 들어가 정여준을 만나면서부터 이들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시작된다. 반전 요소 중 하나인 윤서리의 능력 덕분에 이야기는 시간을 넘나들고 같은 사건을 반복하는데, 이번 시간대에서는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헤쳐나갈지 지켜보는 것이 관전 포인트였다.

 

 우리나라 SF 소설은 왠지 세계관이 탄탄하지 않을 것만 같은 선입견이 있어서 쉽게 시도해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번 독서를 통해 한국형 SF 소설이 배경적 특징 덕에 오히려 현실감을 돋워주어 더 깊게 빠져들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장 옮기기]

 

 "비원이 아슬아슬해서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 아니, 아슬아슬해야만 살 수 있는 거야. 살려면 아슬아슬해 보여야 하니까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고 있는 거라고, 호섭아. 이 아슬아슬하지도 못한 놈아."


 꼴사나운 건 알고 있었다. 도망치라고 알려주지 않아도, 그는 이미 도망쳐야 할 때 도망치고 있었고 도망치지 말아야 할 때 당당히 고개를 들며 살고 있었다. 쉬지 않고 도망치며 살고 있는 건 오히려 윤서리 자신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과거로만 도망쳤기에 미래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이제껏 시도했던 모든 노력이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것 같았다. 이 굉장한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게, 고작 한때 반짝했던 추억을 들춰보는 것이라 생각하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런 건 사집첩의 역할이다. 인간이 온 힘을 다해 이뤄야 하는 목적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이 복원자의 숙명적 한계인가 싶어졌다. 복원자의 능력은 되돌리는 것이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런 능력밖에 없는 이상, 끝없이 되돌아가고 되돌아가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인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혼자서 예전처럼 얼마든지 지낼 수 있는데 우리처럼 살 필요는 없어요. 같은 생존자라는 이유로 이 짐을 떠넘기고 싶지 않아요. 제가 싸우는 걸 직접 보고 다시 결정하세요. 부담스럽거나 무서워지면 이 틈에 몰래 도망가게 도와줄게요."

 그러더니 그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시기 전에 이건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정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는 당혹스러운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괜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정여준은 그녀의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보더니 멍하게 중얼거렸다.

 "자꾸 이 생각이 들어서 그러는데… 왜 이렇게 당신이, 익숙하고 그리운 거죠?"


 그녀는 계속해서 같은 시간으로 돌아가 그의 유언을 반복해서 들었다. 정여준은 죽기 직전 매번 단 한 방울의 눈물을 보았지만, 수십 번의 눈물방울을 쌓아가는 윤서리에게는 통곡이었다.

 끊을 수 없는 애도의 굴레에 갇혀 그녀는 생각했다. 사실 난 널 괴롭히고 있는 걸까? 널 살리려는 게 아니라 네 비석을 더 매끄럽게 깎고 있는 걸까? 네가 수천 번 죽은 건 나 때문일까?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가 다시 속삭였다.

 그녀는 진저리치며 시간을 돌렸다.

 무사했을지언정, 그녀는 다행이었던 적이 없었다.


 찢기는 고통을 고스란히 견디고 그는 주저앉았다. 주변의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기를 반복했다. 그럴듯한 주마등이라도 펼쳐지길 기대했지만, 눈앞을 왔다 갔다 하는 건 화려한 환상이 아닌 윤서리의 머리카락이었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 장면으론 이것도 꽤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이 정도 풍경을 그는 원했다. 사람이 얼마나 깊은 나락에서 돌아오든 얼마나 특이한 초능력을 가지게 되든, 그 능력은 아마 누군가를 찌르고 뭉개고 부수기 위한 게 아니라 그저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붙여주며 킬킬거리기 위해 생겨났을 것이다.


 최주상은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하니 그러마 하겠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가영이… 윤서리를 저기 살려두려고 왜 그렇게까지 견디는 거야?"

 정여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주상을 보았다. 그리고 먼 바깥에 환영처럼 스쳐 지나가는 윤서리의 모습을 보고,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겠어요?"

 정여준은 미소 지었다.

 최주상이 그를 완전히 처음 보는 낯선 이로 느낄 만큼 찬란한 미소였다.

 "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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