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y Hand DEEZ

 

 

 동아일보 기자님이 쓰신 수영 에세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갑상선 암과 디스크를 이겨내고 아이까지 키우며 수영하는 삶을 차분하고 유쾌하게 풀어낸 책이다. 기자님 필력이 어마무시해서 한 꼭지만 더 보고 자자, 한 페이지만 더 읽고 자자, 킥킥대며 책장을 넘기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마주하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수영인들이 공감할 만한 포인트를 콕콕 집어서 우리네 인생에 빗대어 표현한 단락이나, 작가님만의 경험을 감동적이고 재밌게 녹여낸 문장들이 가슴에 따뜻하게 와닿았다. 누구나 느껴봤을 엄마에 대한 작은 원망과 그럼에도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작가님의 글 속에서 온전히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물속에 풍덩 뛰어들고 싶게 만드는 건 물론이고, 내 삶 또한 더욱 굳고 단단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강력 추천 에세이다. 표지마저 너무 예쁘지 않냐고...! 소장하고 싶다.


[문장 옮기기]

 

*저병 : 접영을 못하는 병. '만세 접영' '살려줘 접영' '배치기 접영' 등 증상이 다양하다. 피 땀 눈물로 완치가 가능하나 재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수태기 : 수영 권태기. 실력이 늘지 않을 때 수영에 대한 흥미가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 누구나 겪는 대표적인 1차 수태기는 '평영 킥' 단계다. 평영으로 앞으로 좀 나간다고 방심하지 말라. 이제부터 2차 수태기 '접영'이 기다리고 있다. 2-1차 '접영 킥이 안 돼요' 2-2차 '접영할 때 물이 무거워요'를 거쳐 2-3차 '굳이 왜 힘든 접영으로, 인류가 이렇게까지 수영해야 하죠?' 단계쯤 오면 주위를 둘러보자. 초급반의 킥판 동지들 대부분이 레인에서 사라진 상태다.


 의사의 표정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야 하는데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하는 말주변 없는 남자 친구 같았다.


 대한민국 수영장은 곧 할머니들이 지배하는 세계다. 60세 넘은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게 등산, 요가, 걷기, 수영 등 지극히 제한적인데다 관절염, 오십견, 디스크, 나 같은 암 환자가 할 수 없는 운동을 제외하고 나면 남는 건 수영뿐이다. '수영은 할머니들이 하는 운동'이라거나 '어느 수영장은 할머니들 텃세가 심하다더라' 하는 얘기들이 그냥 나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탈의실 대화를 조금만 엿들어 보면 수영장은 할머니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넘어 할머니들 인생의 우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편 뒷바라지,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 꽃다운 나이에는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고. 그래서 온몸의 관절이 아파 오고, 디스크가 터지고, 암 수술을 마친 이후에야 내 몸을 챙기자고 찾은 곳이 수영장 물속이었다고. 젊었을 때는 일만 하느라, 아니면 밥 짓고 빨래만 하느라 친구도 없었다고. 그래서 환갑 지나, 칠순 넘어 찾은 수영장 친구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머리는 백발에 피부는 주름투성이지만 꽃분홍 노란 무늬 수영복이라도 화사하게 입고 싶다고. 매일 접영과 플립턴을 연습하고, 무호흡으로 죽을힘을 다해 자유형을 해 보는 이유는 칠순에도 새로 뭔가를 해 볼 수 있다는 가슴 벅참을 느껴 보고 싶어서라고. 수영장에서는 그래서 나이를 잊게 된다고. 나이 들어 일찍 눈뜨는 새벽, 수영장 문 앞에서 "왔어?" 하고 같은 반 사람들과 인사할 때 할머니들 얼굴은, 그래서 아주 잠시나마 등굣길 여고생들의 얼굴로 바뀌나 보다.


 수영장 단체 강습반에서 '1번'이란 참으로 위대하고도 고독하면서 무거운 이름이다. 수영인들에게 '1번'이라고 하면 '아! 그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자리!'라는 반응이 돌아오지만 수영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미묘한 자리의 무게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학급의 반장? 아니야, 훈련소의 조교? 사실 나는 '1번'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더더욱 설명이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1번'은 단체 강습반의 가장 선두에 서는 사람을 말한다. "IM 네 바퀴 도세요"라거나 "접영 킥, 평영 팔로 두 바퀴 돕니다" 같은 강사의 지시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이행해야 하며, 강습반 전체가 원활하게 돌 수 있도록 늘 강철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뒷사람에게 따라 잡혀서도 안 되고 중간에 쉬어서도 안 된다. "자유형 다섯 바퀴 돌고 시작합니다"라는 상황에서 한 바퀴 더 돌았다가는 수강생들에게 원성을, 한 바퀴를 덜 돌아서는 강사에게 질책을 받는 정말이지 고뇌에 찬 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반에서 '1번'은 일반적으로 '수영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차지하는데 '수영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란 '예쁘다'나 '매력적이다'는 말만큼이나 주관적이라 가끔 수영 경력이 길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1번'자리를 놓지 않아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중급반은 외롭다. 팔을 풍차처럼 마구 돌려도 앞으로만 나아가면 된다 해서, 그러니까 사실은 '까라면 까라'는 게 미덕이라 배워서 꾸역꾸역 앞으로 온 지 10년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앞으로 나가는 게 능사가 아니라 어떻게 나갈지 고민하란다. 자유형은 우아하게, 평영은 세련되게, 접영도 '저 좀 살려줘요' 하는 팔 모양은 이제 안 되는 거라고 한다.

 그래서 가끔 절박한 검색어에 눈길이 간다. 한숨을 쉬며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누구일지, 어떤 마음일지 궁금해진다. 이제 '접배평자'를 다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모든 영법을 엉망으로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자각하고 지독한 수영 권태기를 겪는 중급반들, 이 정도 살면 인생이 안정적으로 흘러가리라 기대했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음을 깨달은 인생의 중급반들이리라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초급의 눈에는 수영을 제법 할 줄 아는, 그러나 상급반이 보기엔 아직 한참 어설픈, 무엇보다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한 채 성장의 한계를 느낀 중급반들 말이다. 인생에도 답이 있다면, 그래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해법이 뚝딱 튀어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는데 그건 개인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리라. 내가 꼬마였을 때 수영을 배웠다면, 그래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그래서 암이나 디스크 같은 건 겪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나만의 비법처럼 수영을 오래오래 해 올 수 있었을까. 지금보다 조금은 덜 우스운 접영을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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